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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하나의 복음, 두 각도, 그리고 네 ‘움직임’
by Matt Smethurst2023-07-13

현실을 직시하자. “복음”이라는 단어는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끼리 나누는 대화에서조차 제대로 사용되지 않는다. 정작 복음 속 중요한 의미가 사라지거나 억제되기도 한다. 복음 속 좋은 소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소식”(news)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결국에는 기독교를 다른 모든 종교와 구별하는 원천이다. 


기독교는, 그 본질을 말하자면, 좋은 ‘조언’이 아니다. 기독교는 좋은 소식의 선포이다. 


복음을 이해하려고 신학교까지 갈 필요는 없다. 사역자가 될 필요도 없다.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복음을 이해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되고서 5분도 기다릴 필요 없다. 


꼭 알아야 하는 건 2,000년 전에 어떤 침략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천국이 예수라는 인간이 되어 이 땅에 내려왔고, 예수님은 새 나라를 열었다. 33년 동안 그는 아버지 하나님을 향해서 확고하고 완벽하게 충실한 삶을 살았다. 당신과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살 수 없는 삶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사랑했기에 마땅히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죽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내가 믿는 사실은 이것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죄 많은 삶을 산 나처럼 취급받았고, 그래서 이제 나는 예수님의 의로운 삶을 내가 살았던 것처럼 대우받는다. 


예수님은 묻혔다. 그러나 사흘 뒤에 벌떡 일어나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 명백하게 사악한 삶이건 교묘한 “종교적” 다양성이건 관계없이, 지금까지 살아온 반역의 삶에서 돌이켜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제 누구도 예외 없이 이생과 다음 생에서 그와 연합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예수님처럼 새 땅에 적합한 새 몸을 입고 부활할 것이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주님의 기쁨에 동참할 것이며, 그분 아래서 영원히 우주의 왕이 되어서 다스릴 것이다. 할렐루야!


회의적인 시대에 이런 이야기는 속기 쉬운 아이들에게나 통할 억지스러운 동화처럼 들릴 수도 있다. 사실이기에는 너무 좋은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나 이 소식은 온전히 사실이다. 우리가 이런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 찬양 가사처럼 말이다. “내가 뭘 했다고 이런 놀라운 상급을 받습니까? 아, 나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비란 원래 공정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자비라고 불린다. 


하나의 복음, 두 각도


나는 버지니아 리치먼드에서 사역하는 목사이다. 내가 사는 이 도시에 관해서 말하자면, 비행기를 타면 더 잘 보이는 것들우리 도시만의 크기, 윤곽, 인구 밀도 등등이 있다. 또한 이 도시의 대로를 걸으면 더 잘 배울 수 있는 것들도 있다. 하늘에서 보는 것과 걸으면서 느끼는 것, 두 가지 관점 모두 리치먼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전체 조감도가 없는 거리 수준의 관찰에도, 거리의 관점이 생략된 조감도에도 허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건 물론 단지 지리학적인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리치먼드의 역사와 문화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배워야 한다.) 요는 한 도시를 관찰할 때도 다양한 각도에서 보지 못하면 일차원적이고 왜곡된 시각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매트 챈들러가 지적한 것처럼 복음은 두 가지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더 잘 관찰할 수 있다. “공중에서” 보는 관점과 “땅에서”에서 보는 관점이다. 버지니아에 수도가 하나인 것처럼, 복음도 하나이다. 하나의 복음을 두 각도에서 바라보며 우리는 감탄한다. 


“공중에” 있는 복음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몇 가지 줄거리로 요약될 수 있는 포괄적인 이야기이다(예: 창조, 타락, 구속, 새 창조). 한편, “땅에서” 보는 복음은 이 장대한 내러티브가 어떻게 우리와 같은 죄인들에게 좋은 소식이 되는지를 구체화한다(예를 들어, 하나님, 인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의 반응).


나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복음이라는 이야기에 대한 간략한 요약을 제시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훨씬 더 많은 내용을 채울 수 있다. “공중”과 “지상”, “와이드 렌즈”와 “줌 렌즈” 같은 상호보완의 관점을 가장 잘 종합하는 한 가지 방법은 복음 이야기를 네 가지 움직임(movements)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통치자(Ruler), 반역(Revolt), 구원(Rescue), 응답(Response)이 그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복음을 보다 더 풍부한 맥락에서 이해함으로써 당신은 앞으로 누군가와 믿음을 나눌 때 훨씬 더 제대로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통치자


“태초에 하나님이…”(창 1:1). 성경은 현실에 관한 역사의 가장 기본적인 진술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고 또 다스리신다. 현대 문화가 흔히 범하는 잘못된 개념과 달리, 하나님은 하늘의 산타도, 우주의 자판기도, 짜증만 내는 교관도, 그리고 아이 앞에서 꼼짝 못 하는 아빠도 아니다. 하나님은 영광의 왕이시며 사랑의 주님이시다. 영원한 백성의 공동체이시며, 성령의 기쁨 안에서 아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사랑과 기쁨에 넘치는 하나님은 삼위로 영원히 존재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주의 중심에 있다.


다름 아니라 바로 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당신과 나라는 인간을 만드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셨고(그분만이 우리를 소유하신다는 의미),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도록(그분만이 우리를 만족시키신다는 의미) 창조되었다. 인간은 성공과 인기, 오락과 로맨스,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로지 창조주 안에서만 제대로 된 의미와 성취감을 추구하도록 맞춤 설계되었다.


자, 당신은 어떤가? 당신의 삶이 창조주 안에서 온전히 만족하고 그를 모든 것 위에 소중히 여기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가? 나는 확실히 아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반역


우리 마음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사랑을 찾는다. 우리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엉뚱한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창조세계를 망가뜨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들을 죄의 바다에 빠뜨렸다. 지금 우리의 상태는 그 두 사람으이 일으킨 비극의 여파이다. 창조주를 위해 살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산다. 죄의 촉수는 우리의 마음을 변형시키고 우리의 사랑을 무질서하게 만든다. 우리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로 물든 본성과 자의로 사랑의 주님에게 반역했다. 

 

죄를 상대적으로 사소하게 간주하는 건 쉽다. 겉으로 드러나는 고약함 또는 하늘나라에서 범하는 주차 위반 딱지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하는 죄는 심각하다. “우주적 반역” 곧 하나님 나라 자체에 대한 반란이다. 


죄의 본질과 관련해서 두 가지 진리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1. 죄는 행동이 아니라 관계와 더 깊은 관련이 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반역했을 때, 그것은 단지 행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존재의 중심에서 시작한 배신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를 속였다. 그래서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죄는 종종 영적 간음으로 표현된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을 중심으로 삶을 구축하려고 발버둥질한다. 창조주께 받은 좋은 선물을 우리는 오히려 창조주를 대신하는 우상으로 만들어 숭배한다. 


2. 죄는 수평적이라기보다는 수직적인 문제이다. 


죄가 미치는 수평적 영향도 파괴적이지만, 죄는 근본적으로 수직적 문제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삼상 13:14)인 다윗은 우리 모두가 처한 곤경을 고백한다. “나의 반역을 내가 잘 알고 있으며, 내가 지은 죄가 언제나 나를 고발합니다. 주님께만, 오직 주님께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의 눈 앞에서, 내가 악한 짓을 저질렀으니”(시 51:3-4; cf. 창 39:9; 눅 15:21).


여기에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sin”(죄)은 단수형이지만 의미는 단지 단수에 머무르지 않는 유일한 영어 명사이다. “Sin”은 “sins”보다 더 포괄적이다. 깊은 수준에서 고찰할 때, 우리는 죄를 지었기에 죄인인 게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말이 옳다. 


하지만 상황은 더 나쁘다. 이것을 숙고하라. ‘나-주의’(me-ism)와 우상숭배의 결과는 다름 아닌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파멸적 갈라짐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들어보자.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의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에게서 얼굴을 돌리셔서, 너희의 말을 듣지 않으실 뿐이다”(사 59:2). 우리는 하나님 형상의 소유자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획을 저버렸고, 그 결과 생명과 사랑의 궁극적인 근원으로부터 단절되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공의의 심판을 맞는다는 의미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죄의 결과로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하나님의 진노, 곧 악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고 확고한 반대 아래 놓이게 되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바울은 신자들에게 묻는다. 이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당신을 반대하시는데, 누가 감히 당신 편을 들겠는가? 


복음을 알고 싶다는 측면에서 볼 때, 그러면 얼마나 선해야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이다. 하나님만큼 선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이 완전하다고 여기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 


하나님과 똑같은 수준을 요구하는 도덕적 완전성은 실로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쁜 소식이다. 한마디로 나 자신의 의로움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우리는 지옥이라는 절망적인 미래를 앞에 두고 있다. 지옥이 어떤 곳인가?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로움도 없는 곳이다. 


여기 에베소 교회에 바울이 한 설명이 있다.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때에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우리도 모두 전에는, 그들 가운데에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에베소서 2:1-3)


그런데 이렇게 계속 우리의 죄와 허물을 나열해 나가는 대신에, 바울은 “그러나”라며 말을 돌린다. 


당신의 영원 여부가 이 작은 한 단어 “그러나”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 적이 있는가? 


구원


그런데 역사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다.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궤적을 바꾸는 사건이었다. 바로 여기에 결정적인 “그러나”가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에베소서 2:4-5)


수 세기에 걸친 하나님 백성의 반역이 있고 나서, 영원한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배아, 아기, 청년, 그리고 성인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갈 수 없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히 2:14-15). 나사렛 목수는 33년 동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끊임없는 헌신과 순종의 삶을 살았다. 그는 쉬지 않고 기도했지만, 고백할 죄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한 번도 참회의 기도를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아담이 살지 못한, 이스라엘이 살지 못한, 그리고 당신과 내가 살지 못한 도덕적으로 완전한 삶을 사셨다.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빌 2:8). 율법을 만드신 이가 율법을 지키다가 율법을 어긴 이들을 위해서 죽었다. 법을 만든 사람이 법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 법을 어긴 이들을 대신해서 죽었다. 


우리는 이제 기독교 신앙의 뜨거운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린 아들에게 벌을 내렸다. 온전하지 않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온전한 그의 아들에게 형벌을 내렸다. 


그러나 유일한 사건은 단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목적이 단지 우리의 죄를 없애는 것뿐이었다면, 십자가의 결과는 다시 우리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에 그쳤을 것이다. 


NBA 정규 시즌에 모든 팀은 여든두 경기를 치른다. 그 어떤 팀도 무패의 완벽한 시즌을 달성한 적이 없다. 이런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 “잠깐만요. 우리 팀 기록은 지금 0-0이거든요? 완벽한 시즌입니다. 한 경기도 진 적이 없습니다!”


누구라도 황당한 소리 하지 말라고 반응할 것이다. “당신 팀은 경기를 하나도 안 했잖아요? 모든 경기를 치르고 다 이겨야 진짜 완벽한 시즌입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의 도덕 기록은 말하자면 0-0이었다. 죄를 짓지 않았기에 “무패”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의로움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결코 “완벽한 시즌”을 보낸 게 아니었다. 하나님에게서 돌아섰을 때 그들은 영적으로 파산했다. 그들의 기록은 0-82로 급락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물려받은 도덕 기록이다. 


그러나 역사의 한가운데서 한 남자가 82-0이라는 전례 없는 기록을 세웠다. 


농구의 예를 계속하자면, 요점은 이것이다. 예수님이 단지 죗값만 치렀다면 우리의 도덕 기록은 0-0일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단지 82패라는 손실만 흡수한 게 아니다. 그는 또한 빈 무덤으로 증명된 여든두 번의 승리를 신자에게 안겨주었다(롬 4:23-25). 우리의 기록은 순식간에 0-82에서 82-0, 그러니까 전패에서 전승이 되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에 우리는 한 번도 그분을 화나게 한 일을 한 적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단지 그분을 기쁘게 할 뿐이다. 할렐루야!


바울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이렇게 표현한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후 5:21).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죄로 가득한 죄인으로 대하셨고, 우리를 흠 없는 삶을 산 그리스도처럼 대하셨다. 신학자들이 이것을 “달콤한 교환”이라고 부르는데, 전혀 이상하지 않다.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 복음을 이해한다고 할 때, 이 모든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청교도 리처드 십스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 안에 있는 죄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비가 훨씬 더 크다.” 당신이 누구든, 당신이 무엇을 했는지에 관계없이 이 놀라운 소식을 들어라. 우리 안에 있는 죄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비가 훨씬 더 크다.


요즘 같은 문화 환경에서 예수님이 단지 우리의 자존감을 높이거나 도덕 모범을 보이기 위해 죽은 게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아무리 선한 의도에서 나왔다고 해도, 그런 식의 관점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인간의 수준으로 왜곡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려고 건방지게 날뛰었기에, 하나님이 몸이 구부려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내가 좋아하는 존 스토트의 설명이다. 


대속의 개념은 죄와 구원 두 가지 모두의 핵심이다. 죄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고 구원의 본질은 하나님이 인간을 대신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맞서 자신의 우월함을 주장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계셔야 할 자리에 자신을 둔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인간만이 있어야 할 곳에 자신을 두셨다.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속한 특권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속한 형벌을 기꺼이 받으신다. 


아멘. 그러나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이 계속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잔인한 죽음 후, 그의 시체는 “안전한” 무덤에 안치되었고(마 27:65-66), 다시는 그 무덤으로부터 전해진 소식은 없었다. 죽음의 세력이 생명의 주를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행 2:24; cf. 3:15). 그는 약속한 대로 셋째 날 무덤에서 나왔다. 


믿음을 나눌 때, 부활이 단지 복음의 “추가 사항”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부활이 없으면 복음도 없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그의 희생이 받아들여졌음을, 죄에 대한 공정하고 완전한 대가를 치러졌음을 공개적으로 확언하셨다. 하나님이 구원 수표에 서명한 날이 성금요일이라면, 수표가 현금으로 바뀐 날이 부활 주일이다. 


죽고 부활해서 승천하고 자기 백성을 위해 지금 중보기도 하는 예수님은 어느 날 재림하실 것이다. 그를 믿지 않은 정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믿음을 가진 자는 자비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이 땅에서 도망가는 게 아니라 이 땅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은 죄가 일으킨 재앙이 훼손하지 않은, 새롭게 창조된 세상을 상속받을 것이다. 성경은 그 현실을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용어인 “새 하늘과 새 땅”(사 65:17; cf. 벧후 3:13; 계 21:1-4)이라는 미래의 집으로 묘사한다.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우리는 통통한 천사들과 황금 하프를 연주하며 떠돌아다니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달리고, 일하고, 놀고, 노래하고, 웃고, 쉬면서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이 베푸는 끝없는 경이로움을 즐길 것이다. 


당신의 응답


고속도로 통행료 부스에서 돈을 받는 사람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게 의미 있는 경험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그건 단지 비즈니스 거래이다. 당신이 돈을 내면 그 사람은 차단막을 올린다. 당신은 당신 할 일을 하고 상대도 자기 할 일을 할 뿐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이런 식의 관계가 아니다. 무감각한 거래 관계가 아니다. 결혼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주 개인적인 결합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자비에 당신 전부를 던진다. 그는 당신을 붙잡고 절대 놓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이 복음을 우리가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는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답할 준비 되었다.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1. 돌아서라


첫째, 죄에서 돌아서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악을 고백하는 데에는 하나같이 능숙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나 자신의 죄 때문에 내가 가장 황폐해져야 한다. 이것이 회개의 의미이다. 마음을 바꾸고 180도 돌아서라. 자신을 위해 살던 삶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 


2. 믿으라


둘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우리는 죄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하고 예수님을 향해서는 “예”라고 한다. 그가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일과 무조건 용서하시겠다는 변하지 않는 약속을 받아들인다.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3. 보물로 받아들이라


우리는 예수님을 소중히 여긴다. 기술적으로 이것은 세 번째 단계가 아니라 두 번째 단계의 결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치아 임플란트 뿌리를 박는 것처럼 단계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구분할 필요가 있다.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님과 구주, 보물로 받아들이는 것을 수반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지옥행에서 나를 구해주는 무료 승차권 이상이라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따르고, 경배하고, 또 소중히 여기고, 즐길 수 있는 살아있는 사람이다. 그분을 아는 것만이,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과 우리가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는 유일한 길이다(요 14:6; 17:3). 그를 통해 우리는 용서의 기쁨과 성령의 도우심, 나아가서 내세의 소망까지 경험할 수 있다.


세례를 받거나, 교회에 가거나, 기독교 정서가 담긴 글을 올리거나, 기도하거나, 카드에 서명하거나, 교회 복도를 걷거나, 여름 캠프에서 솔방울을 불에 던진다고 구원받지 않는다. 우리 각자가 직면하고 있는 중요한 질문은 이런 식의 모든 외양적 요소와 조금도 관계가 없다. 진짜 질문은 당신의 심장을 겨냥한다. 바로 지금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생명을 걸고 오로지 예수님만을 의지하고 있는가?


복음은 응답을 요구한다.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고 바울은 주장한다(고후 6:2). 우리의 믿음을 나누면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요구에 응답하도록 촉구하자. 무엇보다 영원을 결정하는 중대한 결정의 지점으로 그들을 인도하자. 


복음이야말로 지금까지 전해진 최고의 위대한 소식이다. 그리고 누구라도 그 소식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Matt Smethurst의 Before You Share Your Faith: Five Ways to Be Evangelism Ready 에서 간추린 글입니다.

원제: The Gospel Explained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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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Matt Smethurst

맷 스메서스트는 리치먼드에 있는 River City Baptist 교회의 담임목사이다. Before You Share Your Faith: Five Ways To Be Evangelism Ready(2022) 등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